수풀에 숨어서

내면의 수첩 | 2007/09/23 15:58 | 이방인

일주일 남짓 훈련을 받고 왔다.
차를 타고 가며 적을 사격하는 훈련이었다.

마지막 날 실탄을 가지고 보는 실전과 같은 테스트을 위해 일주일 내내 훈련을 하였다.

경쟁심을 유도하고 적절한 병력 분배를 위해 팀을 두개로 나눴다. (Convoy1, Convoy2)
훈련장에서 Convoy1이 훈련받으면 Convoy2는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혹은 기다리는 Convoy 중 일부 인원이 적(OpForce)의 역할을 하였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다른 Convoy를 향해 총(공포탄)을 쏘고, 부사관들은 적에 대한 팀의 대응에서 잘못된 점을 평가하고 피드백하였다.

내가 적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적의 지휘를 맡은 부사관의 지시에 따라 수풀 속에 숨었다. 나는 상대 팀을 실은 차량이 지나갈 때 갑자기 튀어 나와 공포탄을 갈기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그냥 되는데로 갈기면 된다. 어차피 그들의 대응을 살펴보기위해 도와주는 역할에 불과하니 말이다.

차를 타고 훈련을 받는 것 보다야 적의 역할을 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지만, 수풀 속에 숨어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쉽지 않다. 마땅히 엎드릴 곳이 없는 수풀에서는 힘든 자세로 버텨야 되고, 벌레들과 풀들이 손과 얼굴에 자꾸만 닿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어쨌든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키가 높은 풀 사이에 숨어 몸을 최대한 숙였다. 헬멧에는 풀 몇가닥까지 꼽았다.

제법 긴장이 되었다. 땀이 삐질 났다. 오래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들키지 않으려면 계속 숨어 있어야 했다. 작은 날파리들이 성가셨다.

성가신 날파리들 사이로 벌레 하나가 보였다. 숨소리가 닿을 법한 거리에 풀잎에 앉아 있는 노린재 처럼 생긴 벌레였다. 자칫하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풀잎과 똑같은 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벌레도 나처럼 들키지 않기 위해 수풀에 숨어 있었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사실은 미소만 지었다). 그 벌레 앞에서 적에게 들키지 않겠다고 헬멧에 풀을 꼽고, 위장한 옷도 입고 숨어 있던 내 자신이 같잖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벌레는 나보다 훨씬 완벽에 가까웠다.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 평범한 진화의 산물이 잠시 동안의 여유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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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도자 2007/09/23 16:49

    오 스킨이 돌아왔군.

    노린재한테 총을 넘겨주고 너는 빠져나오지 ㄲㄲ

    • 잡상인(雜想人) 2007/09/26 05:45

      ㅋㅋㅋ 적의 역할을 할 때는 재밌다네, 악랄한 표정을 지어주었지 -_-;ㅎ

  2. 비밀방문자 2007/09/23 17:17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잡상인(雜想人) 2007/09/26 05:47

      웅~ 그 날 봤잖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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