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화에 관심이 많지만 '종의 기원'은 커녕 기본교양서라고 할 수 있는 '이기적 유전자' 조차 읽지 않았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은 단 한 권도 본적이 없다. 'The Science Book'을 4~5년 전에 샀지만 사놓고 제대로 펼쳐보지도 않았고, '이기적 유전자'는 도서관에서 빌려서 조금 읽다가 반납하였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은 읽기 전에 항상 두렵다. 내가 밝혀내고 싶었던 것들을 미리 다 해놓았을까봐. 그것도 나보다 훨씬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해놓았을까봐 두렵다. 그래서 그사람의 책을 보는 건 자꾸만 꺼려지게 되었다.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은 앞으로도 안 읽을 작정이다. "저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초등학생도 아니면서, 나는 택도 안 되는 능력으로 이 시대 최고의 지성에게 시기심을 느끼는 것이다.  
그 시기심을 억누르고 '이기적 유전자'를 샀다. '종의 기원'을 읽고 있었지만, 너무 단어들이 어렵다. 배경지식도 없으니 진도도 잘 안나간다. 오래전에 쓰여진 책을 오래전에 번역을 해놓았으니 그럴 것이다. 그래서 '종의 기원'은 잠시 접어두고, 진화론 내의 혁명을 가져온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을 생각이다.

아직 1장(chapter)도 다 보지 못했지만, 사실 지금까지 읽은 것만으로도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도킨스의 주장은 너무나 명확하고, 통찰적이어서 그 이외의 것들은 다 부연 설명이고, 곁가지일 뿐이다. 세상에는 존재 확률이 높은 것들이 더 쉽고 오래 존재할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을 공리라고 해두자. 어차피 fundamental한 입자들이야 계속 존재하는 것들이고, 여기서 존재 확률이 높다는 것은 그 입자들간의 연결일 것이다. 자기 자신을 복제할 줄 아는 분자는 그 존재확률이 다른 것들보다 훨씬 높다. 과정을 생략하여 인간까지 진화가 되었다고 하자. 인간의 신체 뿐만 아니라 복잡한 심리와 사회적 행동들 또한 존재 확률이 높은 방향으로 진화했을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모든 행동은 유전자를 위해서라는 환원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물론 다른 의미로서 환원적이기는 하나 중요한 건 존재 확률이며, 그 척도로 유전자가 가장 적당하다. 왜냐면 그 많은 복잡한 현상과 상호작용 속에서 결국 (거의) 변화 없이 전해지는 것은 유전자이기 때문이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간 죽지만 유전자는 전해진다. 리처드 도킨스는 30주년 기념 서문에서 '불멸의 유전자'라는 제목이 책에 더 적절한 것 같다는 말을 하였다. 도킨스의 역할은 종의 진화로만 알고 있던 진화의 단위를 유전자로 끌어내린 것이다. 유전자로 설명하는 것이 가장 일관성있기 때문이다. 그 이외에는 다 부차적인 것들이다. 유전자가 어떻게 뇌를 만들었고, 뇌가 유전자와 어떤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적인 행위들을 하게 되는지를 밝히면 된다. 구체적인 사회적 행위들과 '생존 가능성'과의 연관관계를 하나씩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울 것이다. 중요한 건 존재 확률, '생존 가능성'이 높은 것들이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점 하나이다.

존재할 확률이 높은 것이 존재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그건 정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회를 진실에 가깝게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내용을 담은 정보들의 풀이 있다고 하자. 실제의 사회와 많은 부분 일치하는, 즉 적합성이 높은 정보들은 생존확률이 높을 것이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이론 중 획기적인 정보의 변화로 적합성을 높인 것들은 고전이라 부른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등등은 적합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것들이기 때문에 고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정보들은 사회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했다. 그래서 거기에 수정이 가해지고, 이론은 더욱 정교해진다. 사회는 계속 변하게 되고, 그 변화에 따라 적합성 또한 달라지게 된다. 그럼 또 새로운 수정이 따른다. 이것은 생물의 진화와 똑같은 과정이다. 빛을 감지할 수 있는 눈의 탄생은 굉장히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생명체들은 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처음의 눈은 단지 빛의 강약 정도만을 알 수 있는 매우 허접한 것이었을 것이다. 눈은 진화를 거듭하며 더 정교해지며 인간의 눈까지 진화하였다. 물론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따라 적합성의 지도가 다르기 때문에, 아주 멀리 있는 것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운 종이 있는가 하면, 동체 시력을 발달시킨 종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눈의 종류도 다양하고, 다리의 종류도 다양하지만, 눈이나 다리가 있다는 공통점을 담고 있는 큰 유전자 틀은 변하지 않듯이 사회와 적합성이 높은 이론들의 틀은 오래 살아남아 후대에 계속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 정보들은 표현형을 달리하여 나타날지 모른다. 러시아어로 쓰여 있을 수도 있고, 한국어로 쓰여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활자로 있을 수도 있고 뇌 속의 뉴런들의 점화 패턴으로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개념에는 조금의 차이밖에 없다. 그 형태를 달리하더라도 계속 전해지는 '개념'이 그 이론의 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유전자도 '정보'의 하나이다. 그 정보의 물리적인 형태가 분자들의 배열로 표현된 것이다.

진화의 기본 원리, '존재할 확률이 높은 것이 존재한다'는 반드시 생물의 진화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진화, 사회적 행동의 진화, 기술의 진화 등에도 똑같이 적용 될 수 있다. 다만 인간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유전자와 완전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뇌라는 것이 생존 전략을 위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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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0 13:10 2007/11/1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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