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서의 계급연기

활자에의 욕망 | 2009/01/13 10:21 | 이방인
아래 글은 군에서의 계급에 너무 몰입해서 자신이 실제로 높은 걸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쓴 글이다.
그런데 너무 공격적인 글이 될까봐 염려한 나머지 글 내용은 반대가 되버렸다. 항상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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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가 신병으로 들어왔을 때 기억나십니까? 사회에서의 모습은 잊어버리고, KTA에서의 겉멋도 털어버리고, 자대에 왔을 때 기억하십니까.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꽁꽁 얼은 듯한 모습 아니었습니까. 신병 기간 동안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차려자세로 어색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방에 동기들이랑 있는 시간이 생기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모습을 계속 지켜보면서 우리는 일종의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급사회에서 계급 역할을 연기하는 연기자 말입니다. 그 중에는 오바해서 연기하는 분도 있고, 연기를 잘 못하는 분도 있고, 연기를 안 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기가 막히게 연기를 잘 하는 분도 있습니다.
꼭 군대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적 역할을 연기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 엄마를 대할 때의 자신과, 친구를 만날 때의 자신, 애인에게 애교를 떨 때의 자신 모두 다르지 않습니까. 심지어 대학교 친구를 만날 때와 고등학교 친구를 만날 때도 다르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러 자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대에서는 얌전히 지내는 제가, 집에가면 엄마에게 짜증만 내는 못된 아들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대에서의 자아가 다른 자아와 다른 점은 필요에 의해 일시적이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제대할 때 쯤이 되면 말을 놓습니다. 선후임 사이가 형 동생, 친구 사이가 됩니다. 군대내에서의 연기를 벗고 본연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그런 점에서 부대에서의 자아는 꾸며진 자아입니다. 2년 뒤면 벗어버릴 답답한 마스크입니다. 하지만 군대의 목적 상 필요한 분장입니다. 공적인 일을 위해 해야하는 연기입니다.
그런데 이 연기를 너무 안하려고 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너무 몰입해도 주위 사람이 당황스럽습니다.
연기를 하라고 주어진 계급을 너무 무시하면 미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또 너무 몰입해서 "실제로" 자신이 높은 사람이라고 여겨버려도 인간적인 교감이 힘든 것 같습니다.

저는 필요한 연기를 너무 안 한 것 같습니다. 필요할 때는 정색을 하고 후임을 혼내기도 해야 하는데, (원래 혼을 못내는 성격이라는 핑계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도 그냥 좋게좋게 웃으며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어제 한 분에게 그런 상황(알면서 실수한 상황)에서는 혼내라는 말을 듣고 저도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앞으로는 가끔씩 정색하고 지적을 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혼내는 연기를 할 때 필요한 것은,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너무 몰입하지 않아 금방 원래 모습(이왕이면 친근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혼이 나는 입장에서는 그것이 역할연기라는 것을 인지하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서로 감정 상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정도의 연기가 필요한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 연기의 선은 차차 다음기회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의없는 발연기나 오바연기는 피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우리는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주어졌고, 이 연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으며, 연기가 끝나면 다시 군대 밖의 일상적인 관계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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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3 10:21 2009/01/1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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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달구지 2010/06/10 05:42

    입대일을 4 일 앞두고 있는 6 월 예카입니다.

    입대 전에 마지막으로 카투사 관련 글들을 찾아보다가 들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국내 판타지 장르의 소설 중에 이영도 씨의 드래곤 라자라는 작품이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작품마다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십니다.

    드래곤 라자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있는데, 대충 축약하자면

    '우리가 아는 한 인간은 서로 다른 자아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자아만 가지고

    인간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

    라는 내용입니다. 혹시 읽어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올리신 글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읽었을때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이방인 2010/06/10 10:55

      입대일이 4일밖에 안 남으셨다니 긴장이 많이 되시겠네요.
      드래곤라자는 들어봤지만 읽어보진 못했습니다. ㅋ
      부대에 가셔도 자아를 잘 가꾸시길 바랍니다.

      건강히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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