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부대에는 EO 라는 부서가 있다. EO는 Equal Opportunity의 약자로 번역하면 기회균등실이다. 이 부서의 역할은 부대 내에 부당한 차별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에게 필요한 제제를 가하는 것이다. 인종, 국가, 종교, 성별 등에 따라 차별을 당하거나 모욕적인 언급을 들으면 이를 EO에 신고할 수 있고 EO에서는 곧바로 조사에 들어간다.
미국에서는 특히 인종 차별에 대해 매우 민감하다. 그래서 인종차별적인 발언, 비하, 편견 등은 다들 조심한다. 겉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예를 들어 백인들끼리만 모인 자리에서도 다른 인종에 대해 비하 발언을 하지 않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 비하 발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위에서 조심해라 누가 듣겠다며 말리지 않을까. 참고로 카투사들은 카투사들끼리 있는 자리는 물론이고 미군과 같이 있을 때도 한국말로 미군 흉을 볼 때가 많다. 물론 개중에는 입을 아끼는 사람들도 있다.
그럼 내집단의 사람들끼리만 모인 자리에서도 편견적 발언을 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속도 그럴까. 구미 권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이 조롱조로 쓰이기도 한다. 실질적으로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으면서 언어만 바꾸며 사실을 숨긴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겉과 속이 다르더라도 겉으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속으로만 생각하는 게 낫다. 비록 내집단의 사람들끼리는 다른 집단을 비하하더라도 다른 집단과 같이 있을 때는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 더 낫다.
단계를 만들어 보자. 1이 가장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2. 마음속으로는 편견적인 생각을 하지만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거나 그래선 안 된다고 생각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는 단계
3. 동일집단 내에서는 타 집단에 대해 편견 섞인 비하 발언을 하지만, 해당집단과 함께 있을 때는 언급하지 않는 단계
4. 비하발언의 당사자가 들을 수 있는 상황임에도 발설하는 단계
5. 언론에서조차 비하나 편견이 섞인 언급을 하는 단계
5의 상태라면 거의 막장이라고 보면 된다. 미군부대 내에서의 인종적인 편견은 2와 3의 중간 쯤 있는 것 같다. 한국에서 이주 노동자에 대한 괄시는 3에서 4정도에 있는 것 같고, 성 소수자 문제는 딱 3정도에 있는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추측한 ‘평균’이며 어떤 문제에서나 다섯 단계의 구성원들이 공존할 것이다.
5의 단계에 있을 때는 괄시당하는 집단 외의 사람들은 문제의식조차 갖지 못할 것이다. 언론이나 기타 매체들을 통해서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하면 4에서 생기는 문제들이 급격히 드러나고 사회적 반성을 통해 3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4에서 3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제도적으로 보완책이 마련되기 시작하고, 2까지 갔다면 제도적인 정비는 물론 문화의 측면에서도 상당히 진보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1까지 갈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직 잘 모르겠다. 개인적은 생각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2의 단계까지 간다면 다음 세대를 통해 1까지 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마음 속 까지 바뀌기는 상당히 어렵지만, 겉으로 아무도 드러내지 않는 상황이라면 다음 세대에서는 교육을 통해 편견을 갖지 않지 않을까.
이것은 꼭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만은 아니다. 내가 평소에 자주 비판하는 배타적 민족주의, 외모 지상주의, 개인의 집단 동일시, 학벌주의 등에 대해 나는 속마음까지 깨끗하다고 자신할 수 없다. 오히려 내 자신을 관찰하면서 분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음속을 관찰하며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메커니즘을 알 수 있다.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과 마음속의 반응을 통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최소한 발설하지 않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속과는 반대되는 말을 함으로써 그 다음 단계로의 진보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Comment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