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축구란

활자에의 욕망 | 2008/08/16 13:53 | 이방인
2002년 월드컵. 총 세 경기를 경기장에서 봤다.

한국 대 폴란드, 한국 대 미국, 프랑스 대 우르과이.

한국 대 폴란드 경기는 예매를 하여 친구와 함께 1등석을 사서 봤고, 나머지 두 경기는 월드컵 시작 후 우연히 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으니 용돈으로 사기는 힘들었고, 설날 때 모은 돈을 털어서 표를 샀다. 그만큼 국가대표 축구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

1998년 월드컵 당시 한국 축구는 항상 일본 축구와 비교되었다. 일본 축구의 백년지대계를 바라본 축구 육성 사업에 비교되어 한국의 열악한 유소년 축구 환경과 프로축구의 취약함은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다. 나도 pPANIC 카페에 한국 축구의 미래를 염려하는 글을 썼다. 월드컵 때만 금방 달아올라 프로축구나 유소년 축구에 관심이 쏠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식어버리고 장기적인 계획은 전혀 수립하지 않는 축구협회와 정부를 비판하는 글이었다.

한국 축구에 대한 애정은 평균이거나 평균보다 높았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아무도 프로축구를 보러 가지 않는 현실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프로축구가 성장해서 저변이 넓어져야지 유소년 축구도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더 좋은 선수들이 발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어느 순간부터는 국가대표 경기도 보지 않고, 경기 승패에도 별로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박노자의 '나를 배반한 역사'라는 책을 읽고 나서부터로 기억한다. 근대에서 강한 체력은 강한 국가를 상징하였고, 한국에서의 축구는 스포츠가 아니라 강한 국가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상징이다. (열등감은 우월감으로 극복하려 할 때 더 강화된다.)

2002년 월드컵 때 'Be the Reds' 티를 정말 자주 입고 다녔다. 주위에 빨간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을 보면 핀잔을 줬고, 폴란드와의 첫경기 때는 빨간 물이 뒤덮고 있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였다. 하나 되는 감동을 좋아했고, 희열을 느꼈다. 나중에 그것이 곧 '파시즘'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단결을 강요하는 것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국가대표 축구에 애정이 가지 않았다. 특히 부진한 경기를 하였을 때 선수와 감독에게 날아가는 비난의 화살들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축구를 대할 때 드러나는 내재된 폭력성을 일깨워 주었다. 온순한 성격의 사람이 운전대를 잡으면 확 달라지듯이, 축구를 볼 때도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평소 모습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런 이유로 요즘에는 국가대표(올림픽 대표 포함) 축구를 기다려가며 보지는 않는다. 그냥 다른 스포츠와 비슷한 애정으로 본다.

지금 생각하면 예전에 프로축구를 살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유소년 축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참으로 모순적이다. 프로축구가 살아나면 국가대표도 함께 사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나 언론의 주장은 국가대표를 살리기 위해서 프로축구를 살리자는 것인데, 이 경우 목적과 수단이 상충된다. 프로축구가 진정으로 살아난다면 국가대항전에 대한 지금과 같은 열망과 관심과 투자는 있을 수 없다.

프로리그는 자본주의 원리를 따르고, 현재의 국가대표 축구는 국가의 투자로 돌아간다. 국가대표의 목적과 프로팀의 이익은 일치하기도 하고 상충하기도 한다. 일치하는 경우는 1998년 월드컵 이후 순간적으로 프로축구의 인기가 올라갔던 때를 들 수 있는데, 국가대표팀의 성공은 프로의 흥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그러나 이것은 한국 축구처럼 국가대표 위주일 때 가능하다). 그리고 국가대표팀에서 눈에 띈 선수가 해외로 이적할 때 프로팀은 이적료를 벌게 된다. 상충하는 경우 중 대표적인 것은 프로팀 선수의 대표팀 차출인데, 프로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는 팀일수록 대표팀 선수에 뽑힐 선수를 많이 보유하고 있기 마련이고 대표팀 차출로 인해 전력에 공백이 생기는 것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지나친 선수 차출은 프로 시스템 자체를 흔들 수도 있으며, 프로로의 투자를 위축케 한다.

국가대표의 실력을 높인다는 목적으로 프로를 살리려다 보면 프로도 못 살리고 그래서 국가대표도 못 살린다. 어찌어찌 해서 프로리그가 살아난다해도 국가대표 경기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 그러니 국가대표와는 상관없이 프로스포츠 자체를 위해 프로축구를 살리거나, 아니면 국가재정을 축구에 무리하게 투자를 안 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에 의해 돌아가는 스포츠 시스템보다는 차라리 돈의 원리로 돌아가는 시스템이 낫다고 생각한다. 즉, '태극 전사', '투혼' 같은 단어들을 붙여가며 축구선수 개인에게 굴레를 씌우기보다는 '너는 얼마' 가격을 매기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다. 민족주의적인 목적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프로축구를 살릴 수 없다. 아니, 프로축구를 굳이 살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 더 맞다. 그건 프로축구 관계자들이 해야할 일이지, 국가가 세금을 써가며 해야 할 일이 아니다.

한국사람 중 축구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축구를 '보는 것'을 좋아하는 집단이 많아진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유럽축구가 방송되면서 생긴 팬층이 그들인데, 그 이전까지는 국가주의적 열등감이 투영된 국가대표 축구만 보는 대다수의 남성 국민과 소수의 프로축구 서포터즈들이 전부였다. 국가대표 경기가 있는 날 매스컴은 모든 관심을 축구로 모으지만, 경기장에 찾아간 사람들이나 식당에 앉아 욕을 하며 축구를 보는 사람들이나 사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프로축구를 살리려는 노력들이 계속 무위로 돌아가는 것은 원래 팬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프로축구가 살아나려면 일단 서포터즈들의 숫자를 늘리도록 노력해야 하고, 지금의 프로야구처럼 경기장에서 응원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문화를 프로축구 관계자 스스로가 만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유럽 프로 축구 팬이라고 자칭하는 이들도 사실 누구누구의 이름과 플레이 스타일을 들먹이며 남들한테 과시하길 좋아하는 가짜 팬들이 많아 보인다. 그들도 가짜 축구팬이기 때문에 한국 프로축구의 흥행과 연결되지 않는다.(그들은 보통 K-리그가 수준이 너무 떨어져서 한국 축구는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

국가대표의 흥행에 기대지도 말고, 수준차이 발각에 의한 역효과만 나는 박지성 붐에도 기대지 말고, 프로축구 협회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안되면 어쩔 수 없다. 원래 한국사람이 축구를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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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pinfaktor 2008/08/18 23:15

    나도 프랑스 대 우르과이 부산가서 봤었는데...

    • 잡상인(雜想人) 2008/08/20 17:49

      그 때 0:0 이라서 돈아까웠어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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